내 그림을 위한 변명 / 金宗學

내 그림을 위한 변명

金宗學

 

1.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그림 그리기가 즐거웠다. 대학 때부턴 그림 그리기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괴롭다.

잘 떨어지면 즐겁다. 그런데 잘 된 그림인지는 나로서는 금방 분간이 잘 안 간다. 남들이 보고 좋다 하면 그때야 좋다는 느낌이 온다.

그림은 정신없이 빨려드는 기분에 그린다. “잘 만들어졌을 때 느끼는 쾌감, 그것 하나만 바라보라” 했던 로댕 말은 맞는 말이다. 르누와르는 그림을 그리고 한 달 후 그게 좋아 보이면 붓을 꺾으라 했다.

나는 신라 경순왕 후예로서 경주 김씨 계림군파다. 할아버지 말씀에 고려에 망하자 신라 귀족들이 국경지대로 내몰렸다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해서 평북에 살게 되었다.

우리 조상 무덤 중엔 목이 없는 무덤이 있다. 임란 때 선조 임금이 피난 가던 중 옥쇄를 우물에 빠뜨렸다 한다. 그 조상이 그걸 뒤져 찾아내곤, “저런 무능하고 못난 임금이 있어 나라가 이 꼴이니 이제부터 내가 임금 해야겠다”라며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목이 잘렸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가(一家)도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 당시의 법도지만 임금이 스스로 부덕(不德)을 인정해서 무사할 수 있었다.

내 할아버지는 시골 서당의 훈장이었다. 글쓰기를 한평생 그치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도 손으로 글 쓰는 시늉을 했다. 한시(漢詩) 짓기를 즐기면서 이런 말씀을 하곤 했다. “남자 나이 마흔에 장군도 되고 재벌도 되고 황제도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화가는 예순부터이고 시인은 일흔부터다.”

 

2.

내 나이도 이제 예순 줄에 들었다. “화가는 예순부터”란 말은 서울미대 시절의 스승 장욱진(張旭鎭) 선생도 하시던 말씀이다. 아무튼, 나의 예술적 기질은 할아버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40대 중반까지 항상 내 머릿속에는 서구의 미술사조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가득했다. 미국에서 아니면 일본에서 10년 정도 생활도 하고 싶었다. 청년 시절에 인연이 닿아 일본의 한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입체미술도 두 번 발표해서 호평을 받았다.[1] 생각해보니 리차드 롱[2]의 화풍을 일본 사람이 받아들인 것을 내가 재탕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 생활 2년 만에 1970년에 귀국했다. 그때 일본 화상(畵像)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너희 산야(山野)에서 그림이 나온다.”

그러는 사이에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좌절을 이기고자 1979년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좌절의 마음이 깊어져 설악산 폭포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명색이 화가인데 자식들에게 그림 백 점도 남기지 못했다 생각하니 죽을 수 없었다.

설악산에서 지나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림 의욕도 새롭게 샘솟는다. 그림 그리기란 사람이 자유로워 지고자 함인데 지금까지 이념의 노예가 되었던 것은 말도 안 된다. 일본 화상의 충고가 예언적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화가의 숙명적 책임이라 통감했다.

 

설악산은 온통 들꽃 천지다. 가을꽃이 아름답고 겨울에 죽어가는 꽃은 더 아름답다. 꽃은 죽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3]봄에 새싹이 필 때 고결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래서 봄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꽃이 없다.

사계절에서 맨 마지막으로 피는 꽃이 용담이다. 용담꽃은 벌이 날라오면 꽃잎을 오므려 가두었다가 교배가 끝난 뒤 날려 보낸다.

꽃을 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어째서 ‘연약한’ 꽃을 그리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같이 현대추상화에 매달리던 동료 화가들이 비판성 뒷소리를 한다는 소문도 나는 듣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곧잘 꽃을 여성과 연계시킨다. 하지만 사자나 거의 모든 새가 남성 쪽이 더 화려한 것처럼, 화려함과 향기로움을 뽐내는 꽃 또한 나에겐 남성으로 보였다. 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전문가가 적은 책[4]을 보니 꽃의 세계도 남성의 요소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꽃은 대개 꽃받침과 꽃잎 그리고 암술과 수술로 이뤄지는데 암술만 빼고 나머지는 수술의 변형이다.

꽃잎은 꽃의 가장자리에 있던 수술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넓적해진 것이 불과하고, 꿀과 향기도 식물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남성기관인 수술 꽃잎의 아랫부분에서 만들어진다. 여성의 향기로 쓰이는 장미 향 등이 모두 남성의 기관에서 만들어진다.

앞으로 산, 바다, 폭포 등의 사계(四季)도 그리고 얼마 전 사진으로 접해본 무너진 고구려 성(城)도 그리고 싶다. 사람도 그리고, 도시도 그리고, 역사도 그리고, 동물도 그리고 싶다. 성곽을 그리고 싶은 것은 키페르[5]가 피라미드를 그린 것이 좋아 보여서다.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선생의 말인성 싶은데 “예술은 섹스라 했다. 흥분과 즐거움이 있고, 또 끝남의 허전함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불어 선생이 기억에 남는다. 끼가 많았던 선생님인지라, “사랑! 있을지어다” 한마디하고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목이 삐딱한 모습을 희화(戱化)해서 ‘11시’라 별명 지어 부르던 그 선생님의 독백인지 선언인지를 다른 동기생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나는 지금도 그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고 역사도 그렇다”했다.

사랑이 예술의 근본인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꽃과 곤충과 함께, 새를 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가 우리 집에 와서 알 낳고 키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새끼가 부화하니 부모 새가 처음에는 작은 먹이를 가져다주고, 차츰 커가자 새끼새 몸뚱어리만한 먹이를 가져다 준다. 그 정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자극했다.

하도 신기해서 새끼 새를 새장에 넣어두고 새장 틈새로 어미 새가 먹이를 날라다 주면서 키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갓 태어난 새끼가 똥을 누면 어미 새가 주워 먹었다. 조금 더 크니 새끼 새가 스스로 둥지 바깥으로 똥을 누었다. 보름 만에 다 자라 날아가고 말았다. 딱새였다. 새의 부화와 성장을 보고 있노라니 사랑의 실체 바로 그것이었다.

 

설악산을 걷다 보면 짐승들의 똥을 자주 만난다. 국립공원 설악산 관리공단에서 동물의 똥 전시회를 연 적도 있다. 큰 짐승의 똥은 굴고 작은 짐승의 똥은 작고 동글동글하다.

불쑥 “예술은 똥”이란 생각이 든다. 건강할 때의 똥은 걸쭉하고 잘생겼다. 편치 않으면 설사 쪽에 가깝다. 똥 모습은 속일 수 없다. 건강상태, 정신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

피카소 같은 거장은 큰 짐승의 똥이다. 작은 짐승의 똥 또한 작아도 아름답다. 둘이 비교의 대상이기보다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예술의 세계요, 그림의 세계다. 작가는 배설하는 쾌감으로 살아간다.

1980년대 초 강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교수가 되면 작가가 못 된다는 말도 있고, 스스로 판단해도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만에 그만두었다.

고향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땅이다. 사자, 호랑이는 어쩌다 사슴 같은 큰 동물을 잡아먹고 한동안 잠을 자지만, 작은 동물을 하루종일 먹이를 찾아 헤맨다. 나도 맹호처럼 기운생동을 쫓아 순간적으로 그린다. 쌓아가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루오(G. Rouault)처럼 쌓아가면서 그리는 그림도 있다.

동양화에서 숭상하는 것이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동양화 정신을 알게 된 것은 한 달마다 다른 분야를 익히도록 장려했던 미술대학 장발(張勃) 학장의 가르침 덕분이다. 내 경우, 기법은 서양화지만 동양화를 그리는 셈이다. 사생한 것을 토대로 일일이 꽃을 그리고 있으니 기운생동이 약해졌다. 그래서 꽃을 한참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머리에 넣었다가 그다음엔 화폭만 바라보고 쏟아낸다.

기본은 사실(寫實)에서 출발하지만 추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상이 안 된다. 몬드리안은 초기에 꽃을 그리고[6] 나중에 추상으로 돌았지만, 나는 추상에서 구상으로 돌았다.

 

요즘 미술판을 바라보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덕을 실감한다. 미술은 과거에서 쭉 흘러왔지만 전성기는 종교화가 집중적으로 그려지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지오토(Giotto di Bondone) 같은 사람은 교회 쪽의 전폭적 지원 속에서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지금은 다르다. 큐레이터 비위를 맞추어야 살아남는다. 뉴욕 쪽을 곁눈질해야만 하는 그런 시절이다.

세쟌느, 고흐는 그런 제약이 없을 때 살았고 그래서 좋은 그림이 나왔다. 문명이 덜 발달했을 때는 조그마한 지방마다 그림이 볼만했다. 죽어야 판가름이 나는 게 그림인데 지금은 20대, 30대의 대가(大家)가 나오는 시절이다. 바스키아[7] 같은 작가가 좋은 작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비평가, 화상 등을 생각할 것 없다. 팔리면 먹고 살고, 안 팔리면 죽는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아동미술’, ‘입시미술’로 화가 재벌이 나왔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미술계의 참모습일 수 없다. 그림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은 데는 형님[8]의 너그러운 보살핌이 절대적이었다. 수억 원을 지원받았다. 형님도 이제 늙었다. 농담 삼아 나더러 그림을 많이 그려 노후(老後)를 보살펴 달라 한다.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역시 사업보단 예술이 질긴 것이다.

골동은 사고 싶은데 아내가 돈을 다 쥐고 있어 안달이 날 때가 있었다. 골동상이 내 그림하고 바꾸자 하길래 급히 화구(畵具)를 사 들고 여관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려준 적이 있다. 러시아 문학가 도스트에프스키가 노름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듯이, 나도 골동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시 그렇게 그린 그림에 좋은 것은 드물었다.

추사가 좋은 것은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정진이 있었고 적당히 세상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나에게도 최고의 스승이다. 그래서 내 형편에 큰 돈을 주고 추사 한 폭을 마련했다.

믿음은 불교 쪽이다. 경(經)은 읽지 않지만 “죽이지 말라”라는 말씀은 명심하고 있다. 한평생 마당에서 빗질만 해도 거기에 득도와 해탈의 경지가 있다 했고,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한평생을 산다면 보람찬 인생이라는 불경 구절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리: 김형국, 1998.10)

 

 

 

 

[1] (정리자 주) 1970년 2월에 일본 동경의 무라마쓰화랑에서 입체미술을 갖고 개인전을 열었고, 4월에 동경의 한 어린이공원이 주최한 입체미술전에 출품했다.

[2] Richard Long(1945- ). 영국 조각가. 세계 각지에 산재한 고유한 나무, 돌 같은 재료를 이용해서 단순한 기하학적 조형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한 랜드 아트(land art) 작가.

[3] 화가와 절친한 동양화가 송영방(송영방)은 “종학이 꽃 그림에는 슬픔이 진하게 깔려 있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런 발언하고 관련이 있지 싶다.

[4] 반옥, 『꽃은 남성이다』, 도서출판, 다움, 1996.

[5] Anselm Kiefer(1945- ). 현대 독일의 신표현주의 작가. 피라미드 사진 위에다 그림을 그리곤 한다.

[6] David Shaprio, Mondrian: Flowers(New York: Abrams, 1991) 참조.

[7] Jean-Michel Basquiat(1960-1988). 미국화가. 낙서(그래피티)풍의 그림을 그렸고, 앤디 워홀과 작업한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8] 金宗河(1934- ). 고려합섬그룹을 공동 창업한 실업가, 대한체육회 회장 역임.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