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의 그림 반생기 / 김형국, 서울대 교수

 

1.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고려 말 때 큰 스님 나옹(懶翁, 1320-1376)의 시(詩)다. 내 마음에 꼭 들어 외우고 있단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가련다.”

딸에게 보낸 1987년 2월 5일자 편지에서

 

명산에 안겨 오래 살다 보면 해맑은 환경을 닮기 마련일 것이고, 마침내 스스로 넉넉한 자연이 되는 달관(達觀)이 몸에 익을 터다. 설악산 안팎의 큰 절에 오래 주석해온 오현 시승(詩僧)이 “…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라 읊조림도 그런 내력일 것이다.
여기 설악산을 닮으려는 사람이 또 있다. 서양화가 김종학(金宗學) 바로 그 사람. 풀벌레로 울고 풀꽃으로 웃는 그의 방식은 화폭을 통해서다. 그의 화폭에는 울산바위, 천불동 같은 설악의 커다란 매스가 떡 하니 자리 잡는가 하면, 그 산야에 깃든 들꽃과 들풀 그리고 산새가 아름답게 수 놓여 있다. 이십 년 넘게 국립공원 설악산 자락에서 펼치고 있는 작업이다.
두 사람 사이에 개인적인 교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시인과 화가는 도반(道伴)이 틀림없다. 설악산에 산다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 했던 선현의 절귀(絶句)처럼, 시와 그림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산야가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그러기에 김종학은 진작 ‘설악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이 시대 애호가들의 사랑이 각별하다는 뜻이다. 7할이 산인 국토환경에 절어있다 보니 산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태생적 체질이 되고만 덕분이라거나, 자연이 베풀어주는 아름다움의 대표적 상징인 꽃에 대한 사람의 원초적 친화성 덕분이라 말하면 이건 너무 피상적인 설명이다. 산과 꽃을 그린 화가라고 해서 모두 애호가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김종학 그림에 대한 폭넓은 사랑의 까닭은 오히려 다른 데 있지 싶다. 이를테면 “빼어난 안목가의 눈은 만인(萬人)의 눈을 대신한다”는 말처럼, 설악산을 색채와 형태로 바라보는 그의 특출난 시각, 이를 구현한 필력(筆力)이 많은 관심 인사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색채를 배열해서 시를 쓴다”라는 반 고흐의 확신처럼, 김종학 또한 삶의 애환, 그리고 이를 뛰어넘으려는 삶의 꿈을 설악산의 이름으로 화폭에 담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2.
“흰 눈이 내려서 그런지 그렇게 깜깜한 밤이 아니구나. 아빠는 지금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단다.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창조의 길을 가는 사람만이 갖는 특권이다. 물론 외롭고, 고달프고 때로는 겁도 나지만, 오직 자기 홀로 서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아니 길이 없는 길을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는 재미는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야.”

딸에게 보낸 일자 미상의 편지에서

 

김종학의 설악산 그림이 갖는 미덕은 동업자들도 진작 인정한 바다. 대학에서 함께 그림을 공부했던 동양화가 송영방이 그를 ‘또 다른 설악산’ 내지 ‘설악산의 분신’이란 뜻으로 ‘별악산인(別樂山人)’이라 별호(別號) 함도 그의 작업에 대한 평가의 일환이다. 그 사이 설악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산중에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중산(中山)’이라 자호한 바 있지만, 주위에서 ‘가운데 중(中)’자는 장개석, 박성희 같은 절대권력자들의 아호(雅號)에서 흔히 쓰이던 글자라 지적받고 있던 차 마침 지기(知己)가 같은 뜻으로 지어준 아호가 고맙기만 하다. 아무튼 김종학이 설악산의 분신으로 여겨지기까지는, “높은 산은 골이 깊기 마련”이란 말처럼, 첩첩의 회의와 겹겹의 좌절이 있었다.
김종학은 6·25동란의 참화를 이기려던 전후복구기에 그림공부를 시작한 사람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복구기의 어려움이 점철된 그때의 환경은 역설적으로 화가 지망생에게 전쟁과 빈곤의 반대 상황인 평화와 여유가 깃든 아름다움의 세계에 대해 동경을 자극했다. 폐허 속에서 꿈꾸는 아름다움처럼 절실한 게 없지 않았겠는가.
그때 화가들은 굶주림과 빼앗김의 악조건에 반작용으로 그림 그리기에 매달렸다. 가난 벗기에 급급하던 상황에서 그들이 그림을 고집한 것은 화가의 길을 『버린 자식의 소행』으로 여기던 인심을 이겨내고자 했음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화가 지망생은 치열한 용기의 화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 그리기의 동기부여가 치열했던 그때 상황은 김종학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김종학과 절친한 친구들인 한용진(韓鏞進, 1934- ), 윤명로(尹明老, 1936- ), 김봉태(金鳳台, 1937- ) 등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들이 노년에 이르러 그림이나 조각 분야에서 제각기 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볼 때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제는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지 싶다.
김종학의 그림 작업에는 시대의 의미가 계속 투영된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영일(寧日)이 없던 분위기가 걷히고 차츰 사회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서구의 모더니즘 사조가 우리의 화단에 물밀 듯이 파고든다. 외국의 그림 사조라곤 겨우 일제시대에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아주 간헐적으로 알려진 데 불과했던 이전 상황과 견주어 보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충격을 딛고 일어선 “미술계의 전후복구”는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등 각종 모더니즘의 사조에 대한 탐닉으로 나타나는데, 김종학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3.
“그림도, 인생도, 산고같이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단다. 잘 될 때도 있으나 안될 때도 있단다. 대학 시절엔 잘 될 때 보다 잘 안 될 때가 더 많은 괴로운 순간, 순간이 많았단다. 그림이 잘 안 될 때가 너무 많아 괴로워하고 자기 자신에게 화도 내고 한 적이 많았단다. 이제는 한 방향을 잡아 계속 밀고 나가고 있지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또 추상을 하다 보면 구상이 생각나고, 구상을 하다 보면 추상이 생각나는 방황의 계절이 꽤 길었어.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그 방황이 끝났어. 돌이켜 보면 그런 방황과 갈등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방향도 못 잡았을 거야.”

딸에게 보낸 일자 미상의 편지에서

 

모더니즘 미술사조에 던져지면서 20대 중반의 김종학은 그림을 평생의 일거리로 삼는다. 그림이 좋아서 중학시절 미술반에 기웃거린 지 10년 만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것은 어릴 때부터라고 한다. 고향 평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인데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문기(文氣)가 있던 분이라 가정적 반대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시인을 최고 경지의 인생이라 여긴 분이고, 재력을 크게 일군 바 있는 아버지 역시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은 없다”며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했던 일본 유학생 출신 고희동(高羲東, 1886-1965)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부조(父祖)는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장욱진(張旭鎭, 1917-1990) 등이 그림에 입문하려 했을 때 극력 만류하던 그들 가족에 견준다면 천양지차의 개화인사들이다. 또한 일본 유학생들이 많이 법학 쪽 공부에 몰두하던 때, “법학은 사람을 다치게 할 소지가 있지만 미술은 그러지 않을 것 같다”면서 김종영(金鐘瑛, 1915-1982)의 동경유학을 승낙한 부조보다도 조금 더 개화된 분이라 하겠다.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착안은 미술에서 소극적 미덕을 찾았던 경우라 한다면, 김종학의 부조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미술에서 적극적 미덕을 찾았던 점에서 그렇다.
북쪽 치하에서 월남한 그는 제동 초등학교를 거쳐 경기 중학에 들어간다. 그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사이에 학교 성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리막길을 걷는다. 오직 그림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그를 보고 주위에서 ‘고프’라 부르곤 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잘못 읽은 고프 별명을 얻었던 중학 시절, 미술반 선후배와도 곧잘 어울린다. 최경한(崔景漢, 전 서울여대 교수), 한용진(재미 조각가), 최만린(崔滿麟,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선배였고, 이만익(李滿益, 전업화가)은 한해 후배였다.
1950년대 중반에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동란의 후유증으로 아직 사회 각계가 틀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라 대학의 미술교육은 당연히 개설되었어야 할 한국미술사 같은 과목도 없을 정도로 부실했다. 대신, 대학 창설 이후 줄곧 학장을 맡고 있던 장발(張勃, 1902-2001)은 학생들로 하여금 전공에 관계없이 데셍, 조각, 동양화 등을 다양하게 실습하도록 권장하는 선견지명을 보인다. 동양화는 장우성(張遇星, 1915-) 등으로부터 배우는데, ‘붓은 뼈의 연장’이란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한다. 조각은 김조영에게서 배운다. 퍽 병약해 쓰러질 듯 보이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감명스러웠다.
전공인 서양화과에선 김병기(金秉旗, 1916- ), 장욱진 등을 만난다. 모두가 찬밥 신세인 미술을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외길로 달려온 스승들이었다. 김병기의 모던한 화풍의 화풍이지만, 화풍을 따지는 명쾌한 미술이론이 인상적이었고, 별말이 없던 장욱진은 몸짓, 손짓으로 화면의 잘잘못을 가려주곤 했다. 어쨌거나 자랑스러운 교수들을 행동모형으로 삼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재학 중 입체주의(cubism)를 흉내 낸 그림을 국전에 출품하지만 낙선이었다. 월남 이후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게 신세 진 분의 도움을 받아서였는데, 그분의 형편도 어려워지자 하는 수 없이 4학년 1학기에 군대에 입대한다. 모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시간이라 산중(山中)의 부대 막사는 독서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군 복무 중에도 육군 미술전에 그림과 조각을 출품한다. 조각은 산중에 흔한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최고상을 받는다. 서울 미대 시절의 은사 한 분이 심사위원을 맡았기 때문에 최고상을 받게 되었지 싶은데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4.
“새벽에 일어나 그림 그리고 있다. 어떤 때는 그리기가 싫을 때도 있지만 억지로라도 한단다. 그러다 보면 또 신나는 그림이 나올 때도 있어 붓을 놓을 수가 없구나. ‘영감은 무수한 노력의 순간에 온다’는 로댕의 말에 아버지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딸에게 보낸 1992년 4월 11일 자 편지에서

 

군 복무 중에도 서울에 남아 있던 친구들의 활동상을 계속 접한다. 들려온 바는 윤명로, 김봉태 등이 ‘60년 미술가 협회’를 결성하고 그 협회전을 열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김봉태의 회고처럼 이들은 일본어를 모르는 세대이기 때문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라이프(Life) 등을 보고 현대미술의 조류를 접한다. 거기서 만난 새로운 미술사조에 매료된 것은 그것의 위상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기 보다 전후의 상실감 증폭에 따른, 현실 탈출 같은 내재적 욕구의 발산이었다.
소식을 듣고 군 복무 중의 김종학도 출품을 결심한다. 전시는 무엇보다 반국전(反國展)의 기치에 정당성이 있었다. 기치는 국전을 주관하는 심사위원들이 조선시대의 유풍을 이어받거나 일본 군국주의로 편향된 화풍 속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라는 전력이 전문 미술판으로 갓 뛰어든 그들의 미술적 자유로움에 배반된다고 목소리를 높인 선언이었다.
선언은 이전과 판이한 화풍(畵風)의 표출, 그리고 특이한 전시방식으로 구체화한다. 화풍이란 미술의 근대성을 실험한다며 한결같이 앵포르멜 을 들고나온 것이다.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앵포르멜 화풍은 미국 쪽의 추상표현주의와 한통속으로 무엇보다 화면에 뚜렷한 형상이 없는 이른바 비형상적 추상 주의가 특징이었다.
김종학의 당시 화풍은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등의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가까웠다 한다. 그런 사조를 유념해 제작한 작품은 정물을 추상화하는 작업 같았다고 당시의 주변인사들은 기억한다. 그 즈음의 김종학은 재치에다 누구 못지 않은 몰입형 작업방식이었다. 추상에 몰두하면서도 인물묘사 등 구상작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시방식은 때마침 경복궁에서 열리고 있던 국전에 대항한다며 영국대사관 입구의 덕수궁 담벼락에다 그림을 걸었다. 그렇게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림의 크기는 수 백호가 대부분이고 큰 것은 천호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두전시란 점에서 ‘벽전(壁展)’이라 통칭된 이 전시는 이래저래 미술계의 선풍적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마디로 벽전은 모더니즘에 대한 동경이자 구체제에 대한 반기(反旗)였다.
제대하고 학교를 마저 다니는 사이에 이전부터 출입하던 ‘안국동 미술연구소’로 다시 오가면서 미술사조에 대한 궁금증을 눈동냥, 귀동냥한다. 연구소 원장은 경기중학 은사인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이고, 박서보(朴栖甫)가 지배인격으로 있었다.
그때 1960년대 초에 미술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들은 내남없이 프랑스 같은 미술 선진국을 동경했다. 프랑스에 가서 원화 한 번 보고와도 금방 그림 될 것 같다고 여길 정도로 미술 정도 그리고 미술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목말랐던 시절이다.
김종학도 다르지 않아 그곳으로 가고 싶다 하니 친구 한 사람이 1964년에 최초의 개인전을 지금 프레스 센터 자리의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어주고 그림 한 장도 팔아 주었다. 하지만 그 돈은 프랑스행 뱃삯도 되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 문화재 수장가로 유명했던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부인이 미술대학 조각과 강사로 나왔다. 이 인연으로 어느 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미술가를 뽑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나선다. 서양화는 김종학, 동양화는 박내현(朴崍賢), 조각은 한용진으로 짜였지만 무슨 연유인지 나중에 서양화 부문만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하릴없이 일본에서 흘러들어오는 『미술수첩(美術手帖)』 잡지만 뒤적일 뿐이었다.

 

5.
“대학 때 목판화했든 기억이 생각되는구나. 그땐 가난해서 석판화난 동판화 기계가 미술대학에도 없었다. 그래 제일 간단한 기법 목판화를 했지. 아빠는 그 후도 목판화만 고집했어. 목판화가 더 동양적이고 칼맛이 나서 재미있었다.”

딸에게 보낸 1992년 2월 3일 자 편지에서

 

높은 꿈과 열악한 현실 간의 깊은 괴리 속에서 그렇게 방황하던 중, 한국미협 판화분과의 연락을 받고, 1966년의 제5회 동경 판화 비엔날레에 추상 목판화 2점을 출품한다. 추상화이긴 해도 일본 책을 보고 그곳 동향을 감안해서 제작했다. 그것이 장려상으로 뽑혔고 수상차 일본을 갈 수 있었다. 간 김에 그곳 미술관 소장의 명작 원화를 보고 감격한다.
뒤이어 일본의 동경 근대미술관이 주관한 ‘한국현대미술전’에 최연소자로 출품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를 계기로 동경 미술대학 판화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시간을 갖는다. 단원 그림을 모사한 목판화를 제작해서 생활에 보태기도 했다.
일본 생활이 2년쯤 되었을 때 마침 우리 정부가 디자인센터를 설립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연줄이 닿아 그 계획에 참여차 1970년에 귀국했지만 그간의 정신적 긴장과 피로로 말미암아 참여를 중도 포기한다.
지내놓고 보니 이 시기가 김종학에겐 중요한 분기점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아 발견의 한 방편을 만난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한 목기 전시회를 본 것이다. 일본에서 익힌 눈으로 보니 우리 전통 목기야말로 바로 모던아트였다. 일본에서 귀국할 즈음 일본 화상에게서 들은 말도 기억났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너의 산야(山野)에서 그림이 나온다” 했는데, 우선 목기와 민화의 아름다움에서 그 말의 무게를 절감한다.
이즈음의 그림 작업은 돈이 많이 드는 유화 대신에 판화에 열중한다. 오이, 전구 등의 형상을 도입하는 구상적 판화 작업이었다. 판화기법의 연장인 부조(浮彫) 그림에다 담채(淡彩)를 구사했다. 이를 모아 1977년에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일상생활용품을 이미지로 사용한 점은 미국 팝 아트의 영향이라 하겠는데, 주위 사람이 흥미롭다며 긍정적 평가를 해주었다.
하지만 1970년대는 실적 면에서 그림은 뒷전이었고, 목기 등 전통미술품의 아름다움 찾기에 정신을 빼앗긴다. 내가 처음 김종학을 만났을 때가 바로 한창 목기수집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림은 직업이 못 된다”는 어느 화가의 말처럼, 본업인 화가의 길에 오직 한마음으로 전념해도 어려운 판국에 그림과는 딱히 직결된다고 보이지 않는 목기 수집에 탐닉하고 있는 그의 행각은 주변에 의구심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락없는 생활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1960년대 말에 일군 가정생활에도 차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고비를 넘기고자 1977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서 프렛(Pratt) 그래픽 센터에서 다시 판화를 공부한다. 체미(滯美) 중 가정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달았음을 전해 듣고 2년 만에 귀국한다.

 

6.
“설악산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밤마다 별을 쳐다보고 달을 보고… 설악산의 밤은 왜 그다지도 낮게 떠서 빛나고 있었든지. 하여간 열심히 밤하늘을 보며 100장의 좋은 그림 남기고 죽자. 100장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억지라도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날 나비, 꽃 그림들이 나오게 됐단다. 낮에는 그 넓은 벌판을 헤매며 열심히 꽃과 나비를 봤단다. 거기서 아빠는 대학 졸업해 20년 막혀 괴로워했던 그림의 방향도 전환점을 찾아냈다.”

딸에게 보낸 1989년 2월 말일 자 편지에서

 

가정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실의에 푹 빠진 그에게 소싯적부터 아버지 같은 보호막이 되어준 형님이 “설악산으로 가라”해서 그 말을 따른다. 형님이 진작부터 갖고 있던 설악산 입구 마을의 임야에 세워진 허술한 창고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상처받은 마음을 다스리겠다 했지만 뜻과 가지 않아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자기파멸적 생각은 자칫 실행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다행히 김종학은 그걸 이길만한 지극히 인간적인 변명을 찾는데 성공한다. “그림 백 점 정도는 그려 놓아야 아들딸들이 아버지를 화가라 기억할 것인데, 백 점을 그리지 못했으니 죽지 못하겠다”고. 그런 마음을 먹고 보니 설악산 입구 방천 가에 피어난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그의 상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저래 차츰 설악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삶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 슬픈 마음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깊고 신선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만나고, 또 느끼도록 자극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 하지 않는가. 시대가 사람을 만들듯이, 환경 또는 자연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다.

 

7.
“설악산은 스산한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좀 있으면 눈이 오겠지. 그럼 눈 경치도 많이 그려보련다.”

딸에게 보낸 연도 미상 11월 11일 자 편지에서

 

설악은 어떤 곳 인가.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큰 바위들이 온통 산의 표면을 뒤덮고 있다. 조선 헌종 때 여성 시인 금원에 따르면 “봉우리마다 바위가 줄을 지어 섰는데 그 빛깔이 눈과 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과 중보 문헌비고 같은 옛 문헌은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없어지기 때문에” 늘 눈에 덮여있다 해서 설악이라 불렸다고 적고 있다.
큰 바위의 묵직하게 압도하는 허연 바탕 위에 바위 토질이 온상(溫床)인 한국 소나무가 사시 푸름을 자랑하면서 수놓고 있어 곳곳이 하나의 완전한 구조적 구성을 보여주는 경관이 일품이다. 이런 자연환경이면 화가의 작업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의 단원(檀園), 겸재(謙齋) 같은 빼어난 화원들이, 그리고 심지어 민화장(民畵匠)들이 명산 금강산을 많이도 그렸다.
명산의 환경이 그림을 자극했던 경우는 부지기수. 비단 우리만의 경우가 아니다. 구조감이 특징인 남불(南佛)의 상트 빅트와르산은 오롯이 현대회화의 길목을 열었던 세잔의 그림이 되지 않았던가.
금강산이 빼어남은 천하가 다 아는 일지만, 지척의 설악산 또한 금강에 못지않은 명산이다. 옛날 서산대사의 품산(品山)론에 금강은 “빼어나지만 장엄하지 않다(秀而不壯)”고 했는데, 설악에 올라 대청봉을 거쳐 희운각 쪽으로 하산하는 길에 만나는 천불동의 모습에서 설악의 빼어남이, 외설악과 내설악으로 이어지는 봉우리와 계곡에서는 장엄함이 돋보이는 바라 설악이야말로 “빼어나면서도 장엄한” 산이지 싶은 것이다.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세대가 이솝우화에서 따먹지 못하는 포도를 덜 익은 포도라 말하는 듯, 금강 대신 설악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명산을 두루 다녀본 선각(先覺)이 진작 지적한 바이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崔南善)은 산행기(山行記)로도 일대 문장이었는데 그의 ‘설악 기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탄탄히 짜인 맛은 금강산이 더 낫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낫다. 금강산은 너무나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설악산은 그 경치를 낱낱이 헤어 보면 그 빼어남이 결코 금강산의 아래에 둘 것이 아니지만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에 견주면 몇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는 아는 이가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김종학도 최남선의 설악 예찬에 동감이다. 아기자기한 아름다움 때문에 금강산은 여성, 호방한 산세 때문에 설악산은 남성이라 대비하곤 한다. “금강산은 사계절 이름이 따로 있는 데 반해 설악산은 이름이 하나다. 변화는 여성의 속성이기 쉽다는 점에서 금강산은 여성에 비유될 수 있다면 설악산은 무뚝뚝한 남자, 변함없는 남자를 닮아서 늘 설악산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 김종학의 설명이다.
산에 올랐던 나 개인의 체험에 비춰서도 두 산은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금강산은 바라보기 좋은 산이라면, 설악산은 두 발로 걷기 좋은 산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무수한 발길이 이어진 끝에 설악산은 오늘의 한국인에게 조국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현장이 된 것이다.
화강암 산이라는 점에서 설악산은 저 유명한 미국의 국립공원 요세미테와 비교된다. 특히 설악의 울산바위는 수많은 골산(骨山) 곧 바위산으로 뒤덮인 요세미테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지질학적으로 화강암 산은 양파껍질처럼 표면이 풍화되어 떨어지기 마련이라 바위 끝이 둥글둥글하게 변모한 결과다. 그런데 요세미테는 지질 연대가 설악보다 낮기 때문에 바위산에 소나무 등이 아주 드문드문 자라는 데 반해 연대가 높은 설악은 나무가 보기 좋게 잘 자라있기에, 장대하기는 요세미테일지라도 운치는 설악이 한결 앞선다. 그래서 조형작업적 선호는 단연 설악 쪽이다. 그 설악의 아름다움 전파에 김종학이 최일선에 우뚝 서 있다.

 

8.
“(뉴욕의 IBM 본사 건물 내 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전통문화전을 보고) 결국 좋은 것은 어느 때나 알아줄 때가 반듯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전시회 같아 같은 조선인 후예인 아버지도 기쁘다.”

딸에게 보낸 1992년 4월 20일 자 편지에서

 

설악의 자연에 감동되면서 한국 사람이란 정체감에 대해 확신이 깊어지면서 불쑥 역사학자 토인비가 어디에선가 “앞으로 동양의 시대가 온다”고 말한 바가 기억난다. 생각해보니 서구보다 미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은 우리가 높다 싶다는 것이다. 그동안 근대화의 열망으로 열심히 서양을 배우려 했기 때문에 서양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는 처지임에 더해, 우리가 포함된 동양은 체질 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동·서양을 두루 안다고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런 생각의 일환으로 그토록 집념을 보였던 우리 목기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옛 목기의 빼어난 비례감(比例感)에서 세계성과 현대성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그가 항상 가까이 두면서 사랑해 마지않는, 백 년도 넘는 옛 우리 서민들이 사용했던 나무등잔 조형은 곤잘레스(Juan Gonzales, 1876-1942),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같은 현대 조각가들의 조형을 이미 앞서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 연장으로 도자기, 보자기 같은 한국의 조형적 유산 역시 세계성, 보편성에 맞닿아 있음을 확신한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자 갈등과 방황으로 무위(撫慰)의 세월로 여겨졌던 그의 1970년대가 의미 있던 세월이었다고 고쳐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마음의 짐을 들었다고 깨닫자마자 수집품을 서슴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일괄 기증한다. 기증품이 당시의 생활상을 유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 기준에 비추어 빠졌다 싶은 품목은 추가로 사서 맞추어 주었는데 그 비용은 서울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충당한 돈이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기증품이 박물관의 한자리에서 일괄 전시되자 애호가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옛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든 목기이긴 하되 한자리에 모이자 그것들에서 하나의 계통 있는 조형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김종학이 보여준 수집의 열의와 집념은 “수집 활동이 그 자체로 예술로 실감될 정도”였다는, 현재 일본 오사카의 동양도자박물관에 수장된 우리 전통 도자의 수집가로 유명했던 아타카의 경우에 견줄만하다.
목기 수장의 빼어남은 국내의 평가로만 그치지 않았다. 청자, 백자 못지않게 외국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김종학의 소망대로 1955년에 미국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조선 시대의 문예 부흥기로 유명한 18세기의 한국조형미술전을 보여주었을 때, 그의 수집품도 거기에 포함되어 그곳 안목가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것이다.
시가로 따져서도 막대한 목기 수집품을 화가가 거리낌 없이 기증한 데는 당시의 김종학에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지 싶다. 하나는 한국의 전통 조형이 세계성과 연결된다고 확인한 만큼 그의 회화적 지향은 세계성과 간격이 없는 한국의 지방성(locality)에서 재출발해야 함이고, 또 하나는 김종학만의 조형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과감히 떨쳐야 한다는 자각의 발로이다.
자각이란 이런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동양정신에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서 “물건에 집착하면 뜻을 잃는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 말이 틀리지 않을 것임은 동서양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세속적 지혜에서도 확인된다. 밤잠을 잊을 정도로 물건 수집에 집착하면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아내도 팔아 치운다는 말이 있고, 서양 같은 데서는 성욕도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닌가. 어쨌거나 이 가르침대로 김종학은 수집품의 박물관 기증은 자신만의 창작 행로로 나아가기 앞서 그때까지 목기수집에 바쳤던 편집(偏執)적 집념을 떨치는 의식이었다.

 

9.
“꽃을 그리고 나비를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냇가, 폭포 등 글리는 것은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아니 수천 년 좋아하든 대상을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도 그걸 그리면 타락한 화가로 여기는 20세기 회화에 반발하는 의미도 있단다. 무엇을 그릴까 무척 고민도 했었다. 추상부터 시작해서 다시 구상으로 왔지만, 추상의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이지. 엄밀히 말해서 추상적인 뒷받침 없이 그리는 사실화나 구상화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미술은 처음부터 추상과 구상이 동시에 큰 두 줄기로 출발을 했단다. 건축, 공예, 옷 무늬 등은 좋은 추상이고 옛날 원시인들이 살던 동굴에서 석고 데셍도 안 배운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동물들을 그렸니. 그러니까 추상과 구상은 서로 영향을 주는 형제와 같다고 생각된다. 아빠가 그리는 꽃도 실은 사실적으로 피는 꽃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다시 구조적으로 피어나는 꽃이지. 항상 그림 그릴 때 색을 어떻게 배치하고 크고 작은 형태들은 어떻게 서로 배치하는가가 큰 관심사다. 검정 나비가 나오고 새가 나오는 것도 그 색과 형태가 필요해서 나온다. 그림은 자연에 영향을 받고 다시 꾸미는 조형능력에 좌우된단다. 뛰어난 추상회화도 있고 뛰어난 구상회화도 있단다. 아빠 견해론 현대미술은 출발은 좋았지만 너무 새로운 것, 충격적인 것을 찾다가 방향을 잃어버린, 매력을 잃어버린 경향이 있어. 미술은 큰 길이야.”

딸에게 보낸 1991녀 4월 15일 자 편지에서

 

프랑스 고전파 화가 들라크루아는 그림이란 “화가의 영환과 관람자의 영혼 사이에 놓인 다리 같은 것”이라 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화가들은 영혼은 간과한 채 다리의 조형과 구조만을 그림이라 생각하는 편협에 빠지곤 했다.
미술이란 형식이 없는 내용이 없다. 내용은 곧 형식이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 형식적 내용이자 내용적 형식일 정도로 내용과 형식의 합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은 내용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형식의 투쟁이 되곤 했다.
방법론에 얽매이는 함량 미달은 우리 화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김종학 또한 현대회화에서 추상 주의가 압도하는가 하면, 회화마저 오브제에 밀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광주비엔날레를 포함해서 세계 각지의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등에서 어김없이 만나듯이, 오브제 그리고 오브제의 집합인 설치미술(installation)이 압도하는 반(反) 회화적 경향에 대해 심한 갈등을 느낀다.
그 갈등을 딛고 설악을 만나면서 자연을 그려야겠다는 집념에 불탄다. 지금까지 그림 공부가 무수한 이념들에 현혹되어 이것저것, 귀동냥 눈동냥 해왔는데 설악의 아름다움을 만나면서 그의 마음은 갑자기 개안(開眼) 한다. “그림 그리기란 사람이 자유롭고자 함인데 지금까지 이념의 노예가 되었던 것은 말도 안 된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화가의 숙명적 책임”이라 통감한다.
그래서 1979년부터 김종학의 설악산 시대가 열린다. 화풍이 추상 작가에서 구상(具象)작가로 돌아선 것이다. 흔히 구상과 사실(寫實)을 같은 것이라 혼돈하지만 구상은 사실과는 꽤 거리가 있다. 추상에 반대되는 말이기는 하나 구상은 내용적으로 형상성이 있는 추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형상성을 갖추되 작가의 정신성이 강조된다.
주위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다고 작심하고부터는 “외국 미술 동향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이 마음대로 그린다”고 말했지만, 세계적인 구상작가의 동향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프로이트(Lucian Freud, 1922- )도 특히 그가 눈여겨보는 작가다. 그의 1994년 뉴욕 전시회를 직접 본 뒤 화집을 나에게 선물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남은 다 추상으로 갈 때 현대문명 속에서 사랑에 굶주린 인간의 모습을 그려서, 또는 사랑하는 남녀의 벗은 광경을 현대적 구도로 그린 나이 일흔이 넘은 프로이트의 그림에 콧대 높은 미국 뉴욕이 폭발적으로 열광했다, 정말 좋은 전시였다”고 했다.
외국 작가 말이 났으니 말인데 작품 경향에서는 요즈음 구상작가로 크게 각광받는 또 다른 세계적 영국 작가 호크니(David Hockney, 1937- )가 김종학과 많이 닮았다. 나이도 동갑인데다 작업 경력도 추상 작업을 했고 팝 아트 계열의 작업을 열심이었던 점이 서로 닮았다. 그런 호크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이어 영국의 한 화랑에서 꽃과 인물을 그린 구상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계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인물 그림은 반 고흐의 필치가 느껴지는 그림이었고, 꽃 그림은 장미, 해바라기, 바이올렛, 백합 같은 꽃이 대상인 정물화였다. 강렬한 색채를 대비시키고 있음에서 추상 주의가 강하게 표출된 구상화이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드디어 현대회화가 꽃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을 팔려고 꽃을 그리는 화가가 많기는 하나, 현대회화 사조에서 “시시하게 어떻게 꽃을 그리나”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음에 대한 성찰이었다. 호크니가 도달한 꽃 그림은 한마디로 소녀취미의 꽃이 아니라 세상 풍파가 느껴지는 꽃이었다. 이를테면 꽃이 놓은 탁자 옆에 현대생활의 한 상징인 생수병이 놓인 배치에서 그런 것이 느껴진다.

 

10.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고 울리고 자라게 하는 햇빛 같은 존재란 것을 항상 잊지 말아다오. 그림도 그림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면 안 되는 법이 없단다.”

딸에게 보낸 1989년 2월 말일 자 편지에서

 

들라크루아가 말하는 영혼이란 공감될만한 메시지일 터인데 김종학의 구상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건 사랑의 중요성과 위대함이라 할 것이다. 꽃 그림에 열심인 것도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다”고 말하고자 함이다. “꽃은 땅 위에만 피는 줄 알았더니 날아다니는 꽃이 바로 새들이구나”하는 그의 감탄사처럼 그의 화면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새도 역시 꽃일 따름이다.
김종학은 스스로 사랑의 화신이다.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자 지향점임을 전제로, 특히 남자의 경우 연령대에 따라 사랑의 대상이 달라진다 한다. 청년 시절은 여성을, 장년 시절은 물건을, 중년 이후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이 시중(市中)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사랑의 단계설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종학은 이 단계를 두루 거쳤다. 딸에게 독백하고 있듯이, 이성에 눈뜨고부터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 족족 짝사랑해보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했고, 장년에는 이 나라 제일의 목기수집가였다.
중년 이후는 설악산에서 자연사랑에 푹 빠져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들꽃이나 들풀 역시 불교의 가르침처럼 모두가 형제이지 싶고 그래서 그림 공부를 위해 어쩌다 꽃을 꺾을 때면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을 정도다.
자연사랑이 구상작업으로 구체화된 것은 애호가들의 호응은 물론이고 동업자들도 공감한다. 1960년대 초에 앵포르멜 운동을 함께 시작했고 그 뒤로도 계속 추상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지기 김봉태 화백도 그런 사람이다. “김종학의 작업이 추상에서 다시 구상으로 나아간 것은 그가 놓일 수밖에 없었던 삶의 터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있다. 요즘 미술이 오브제, 설치, 행위 미술 쪽으로 치닫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미지의 홍수에 빠져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외국의 어느 미술관은 회화 미술만 수장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그의 미술대학 스승 가운데 한 분이자 한때 미술이론가로 이름을 떨쳤던 김병기화백은 더욱 명쾌하게 말한다. “김종학은 전위(前衛)의 일선에서 퇴각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산은 이처럼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산삼을 캐듯이 신화를 일구고 있다”고. 외딴곳에서 생활하기를 작심하는 데는 여간 비감(悲感)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고갱이 원시성을 찾아 미개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듯이, 그런 작업환경을 마다하지 않았음은 큰 용기가 전제되었다는 점이 바로 신호인 것이다.
남 보기에도 그랬으니 스스로는 오죽 갈등이 많았겠는가. 자연 사랑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결심하고서도 회의는 많았으니, 이를테면 꽃을 사랑의 상징으로 삼는 노릇이 평북 출신으로서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상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평소 기질을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이 어찌하여 ‘연약한’ 꽃을 그리는지 궁금해할 것이라는 점도 회의의 대상이었다. 이 궁금증처럼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영향받은 세간의 인식이 여성을 꽃에 비유하곤 해서 꽃의 성별은 당연히 여성이라 여기지 않는가.
처음부터 김종학의 생각은 달랐다. 사자나 거의 모든 새가 그러한데, 남성 쪽이 더욱 화려한 것처럼 화려한 것처럼 화려함과 향기로움을 뽐내는 꽃도 필시 남성일 것이라 내심 믿어왔다. 마침내 그의 선입관이 옳다고 말해주는 책 을 보고 무척 기뻤다 한다. 꽃의 세계도 남성의 요소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꽃은 대개 꽃받침과 꽃잎 그리고 암술과 수술로 이뤄지는데, 암술만 빼고 나머지는 수술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꽃잎은 꽃의 가장자리에 있던 수술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넓적해진 것이 불과하고, 꿀과 향기도 식물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남성기관인 수술 꽃잎의 아래 부분에서 만들어진다. 여성의 전유물 같은 향수를 만드는 장미향 재스민향 오렌지향 따위가 모두 남성의 기관에서 만들어진다 한다.
설악 풍경의 일환으로 김종학이 그려내는 화폭 속의 들꽃은 면(面) 분할의 기하학적 조형을 보여주기 이전의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초기에 많이 그렸던 꽃 그림과 느낌이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그림 스타일의 전개에서는 김종학은 몬드리안과 서로 대조된다. 몬드리안은 꽃 그림에서 기하학적인 추상 합리주의 그림으로 이행했다면, 전통시대의 우리 보자기가 김종학은 추상작업에서 방향을 바꾸어 목기와 함께 그가 심취해 마지않았던, 전통시대의 우리 보자기가 보여주는 기하학적 구성에서 얻은 배움을 바탕으로 구성력이 강한 꽃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져보면 온갖 실험을 그쳐 나중에 꽃을 그린 김종학이 처음에 꽃을 그리다가 기하학적 그림으로 전개한 몬드리안보다 자연스럽다. 기하학은 기계이기도 한데, 자연을 그리는 것이 그림의 본령이지 사랑의 반대말인 기계 주의로 흐르는 그림은 반(反) 자연이다 싶어 그런 생각이 든다.

 

11.

“설악산 눈 내리는 물이 무섭구나. 여름에 애들이 수영도 하고 고기 잡는 둑에 지나지 않는데 이렇게 힘차고 물살이 빠른지 몰랐다. 마치 평안북도 사람처럼 급하구나. 아니 나처럼 급하고 미쳐 있구나. 바람 쌘 둑에 털썩 주저 않고 손으로 꼭 붙잡고 마치 내가 반 고흐처럼, 아니 팔대산인처럼, 아니 김홍도 물결처럼 비록 연필이지만 나도 급하게 그렸다.”

2001년 2월 23일 아침 9시, 스케치에 붙인 소감에서

 

설악이든 거기서 자라는 초화(草花)든 김종학의 그림은 대상의 아름다움을 구조적으로 또는 골격적으로 보여줌이 특징이다. 이런 작업의 성공은 필시 이전에 추상화에 오래 매달렸던 이력이 힘이 되었다. 추상은 낱낱의 사상(事像)을 보편화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호가들이 “김종학의 화폭에 등장하는 수많은 초화(草花)는 하나하나로 볼 때는 아름답지 않지만 전체로 묶여진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종학 그림은 아동화 같다고 흠을 잡는 사람도 있지만, 이보다는 옛말에 “그림은 간략함을 귀하게 여기지 번채로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미덕의 실현이라 보는 게 옳지 싶다.
주제의 추상화 과정은 ‘벼락같이’ 진행하는 그의 작업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빨리 그려야 작품이 좋지 너무 많이 생각하고 천천히 그린 그림은 잘 안 되는구나.”하고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털어놓고 있듯이, 빠른 붓질에서는 대상의 골격만 남고 세부는 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동양화가 송영방이 지어준 별호 ‘별악산인’은 발음에서도 김종학의 스타일을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되고 말았다. ‘별악’을 소리 내어 읽으면 ‘벼락’이지 않은가.
설악산 주변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유심히 자연을 보고 익힌다. 어쩌다 데셍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마음속에 자연을 새겨 넣는 방식이다. 작업에 임해서는 데셍은 구색으로 옆에 둘 뿐 별로 거기에는 곁눈질하는 기색이 아니다. 마음속에 화상(畵想)이 떠오르면 금방 마르는 아크릴 물감을 튜브채 짜 바르면서 벼락처럼 “그림을 해치운다.”
김종학 그림이 구조적으로 보이기까지는 끊임없이 계속된 공부도 주효했다. 선배 화가들의 빼어난 성취를 눈여겨보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좋아한 서양화가는 여럿이지만 특히 몬드리안도 존경했다는 17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이 대표적이다. 현존 작품은 30점이 조금 넘을 정도라서 미술관 치고 그의 작품 한 점만 있어도 유명 미술관의 반열에 들 정도로 동시대의 렘브란트를 능가하는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 즈음의 네덜란드는 이른바 ‘눈의 시대’로서 망원경, 현미경 등을 이용한 광학(光學)이 당시의 주요 과학적 관심이었다. 그 연장으로 사실 묘사의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빛의 조화로 빚어지는 실내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한 추상 주의가 느껴지는 그런 구상작가다.
전통시대의 우리 조형가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한국작가 치고 김정희(金正喜)를 최상의 조형가라고 추켜 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조형적으로 그가 추사 못지않게 평가하는 화가는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다. 서출인 탓에 뜻을 펴고 세상을 살지 못했지만 시서화에 능했던 선비였다. “크나큰 의리를 한 몸에 지녔다고 자부하던 선비로서 자신의 심상을 내비치는 것으로 겨울 소나무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유명한 <설송도(雪松圖)>는 작자의 자화상이라 여겨질 정도다.
김종학이 즐겨 그리는 일련의 ‘눈밭의 소나무’ 그림들은 바로 <설송도>를 유화물감으로 따라 그린 작품들이다. 고흐가 들라크루아, 렘브란트를 따라 그린 작품을 그렸듯이, 유명화가들도 선배들의 그림을 곧잘 따라 그리곤 했던 방식과 한 통속이다. 김종학의 폭포 그림은 겸재를 따라 그린 것이다.
김종학의 배움은 선비나 화원들의 작품에 한정되는 협량이 아니다. 그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전통시대에 이름 없는 부녀들이 만든 베갯모, 조각보 등이다. 베갯 모에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인 부귀수복을 상징하는 화초들이 아름답게 수놓여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구성미가 뛰어난 조각보를 사랑한 나머지 이 분야의 일급 수장가가 되기도 했다.

 

12.

“이제부터 10년이 가장 중요한 작품을 만들어야 할 시기이다. 대작으로 한 500호은 만들어야 한 화가의 세계를 알 수 있단다. 일 년에 크고 작은 작품 합쳐서 100점씩은 그려야 하겠어. 아빠도 너무 방황한 시간이 길어서 그걸 보충해야지. 설악산은 이름처럼 눈이 와야 웅장하고 아름답단다. 아빠 희망도 설악산만큼 큰 감동을 주는 그림을 남기고 싶구나.”

딸에게 보낸 1992년 1월 18일 자 편지에서

 

김종학은 한국 나이로 일흔을 바라보는 ‘망칠십(望七十)’이다. 그는 “나이 사십에 재벌도 되고 장군도 될 수 있지만 예순이 되어야 화가가 되고 일흔이 되어야 시인이 된다.” 했던 시인 할아버지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순에야 비로소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대학시절의 스승 장욱진의 말이기도 하다. “20대는 의학박사 되기에, 40대는 문학가 되기에 제격이고, 화가는 나이 예순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 길에 든다”는 것. 이 말대로 예순을 갓 지난 1998년에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야 그림이 무엇인지 좀 알 것 같구나”하고 적고 있다.
이제 이 시대 그림 애호가라면 설악산 시대를 연 그의 화풍을 금방 알아챌 정도로 김종학의 스타일은 확고하다. 개성 있는 조형언어를 정립했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김종학 나름의 깨달음 끝에 얻어낸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날 선망의 대상이던 미국 미술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계기로 세계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나는 미술의 상업화가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가능성이 조금 보인다 싶으면 화상이 채근하고 큐레이터가 독촉하는 까닭에 하루에 몇 점씩 기계처럼 그려야 한다니, 그런 환경에서 그림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안 팔렸을 때 좋은 그림이 나왔던 화가의 역사적 숙명을 모르는 짓이고 그래서 미국에서 좋은 화가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 미술이 팝 아트에 빠져들면서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림의 대상이자 스승은 자연인데, 그 자연의 높고 깊은 의미 찾기를 포기하고 상품적 현실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는 것은 타기할 만한 미술의 하향적 타성화에 다름 아니라 보는 것이다.
이런 반성은 그의 설악산 작업에 대한 확신으로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화가는 예순부터라는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장차에 대한 계획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설악산을 근거로 시선을 도시의 많은 사람에게 주어볼 참이라 한다.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산의 숲에서 살다가 들판으로 나왔다는 사실(史實)처럼 그도 설악산을 오가면서 만나는 도시 풍경도 화폭에 담아 볼 것이라 한다. 개인의 선호에 관계없이 도시 생활이 이 시대의 삶이라면 화가의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는 판단에서다.
설악산의 작품 생활이 탄력이 붙었다 해서 그림이 술술 나올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2000년 5월에 스케치북에 적은 자필 수상(自筆隨想)에서 그걸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 “고무줄을 잡아당긴 팽팽한 긴장 상태. 그런 긴장 상태에서 그림이 나온다. 그러나 팽팽한 고무줄을 놓으면 원상태보다 뒤로 퉁겨 나간다. 다시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면 배(培)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는 창작 생활의 기복은 더욱 깊어질 것임도 그가 모르지 않는다.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 이름을 적는 서명에서 그게 어떤 때는 ‘웃는 사람’으로 읽히는 ‘소인(笑人)’으로, 어떤 때는 ‘우는 사람’으로 읽히는 ‘곡인(哭人)’으로 창작의 희비가 심하게 교차했다 하지 않은가.

 

13.

“별을 보며 달을 보며 깜깜한 밤하늘 그 넓은 설악산 들판을 성난 들소 마냥 헤매며 생각하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아낌없이 나를 던지고 죽자. 아낌없이 버리고 크게 살다 죽자.”

딸에게 보낸 일자 미상의 편지에서

 

그림의 정겨운 대상인 설악산은 김종학 개인적 한도 어지간히 식혀주고 있다. 노경에 이르러 태어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한데 생각해 보니 설악산이 꿩 대신 닭으로 그의 한을 풀어주고 있다 싶어서다.
그의 고향은 평북 선천(宣川)군 심천(深川)면 동림(東林)동. 이름으로 따진다면 지금 거처인 설악산이 어지간히 고향을 닮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화가 거처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개울을 ‘심천’이라 부를 만하고, 설악산의 입지는 한반도 동쪽에 우거진 숲에 해당하는 ‘동림’이라 믿고 있다. 한잔하고 기분이 어지간하면 불쑥 자신의 거처를 ‘동림동’이라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설악산 입구 화실이 위치한 동네는 현지이름이 ‘장재터 벼락바위’. 장재라는 부자가 살았던 터라 해서 마을 이름이 장재터이고,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둘로 갈라져 있어 그 언저리를 ‘벼락바위’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그의 별호 ‘별악’의 음독(音讀)이 ‘벼락’이니, 이 인연에서 “땅과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옛말이 하나도 허사(虛辭)가 아님이 알겠다.
“미워해도 닮는다” 했는데, 하물며 장소가 사랑스럽고 고향 같아서 열심히 그리다 보니 노경의 그는 눈 덮인 설악의 모습을 닮고 있다. ‘눈 산’이란 뜻인 설악에는 설경이 제격. 그의 설경에서 눈이 쌓인 산의 주름에 잇대어 서서 눈을 이기는 소나무의 푸르름이 산의 윤곽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의 반백(半白) 머리칼도 바로 설악의 눈 풍경을 꼭 닮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그림은 모두 화가의 자화상이란 지적은 김종학에게도 어김이 없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두 죽고 나면 시와 그림과 공예품 그리고 철학과 종교만 영원히 남아 후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단다”고 말했듯이, 먼 훗날 설악산의 작은 분신이라 여겨진다면 그는 더 바랄 것 없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김종학이다.

 

14.
“육이오 피난 때 부산을 가는 기차를 탔는데 대구 밖에 못 간다고 내리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지. 겨우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는데 새벽 3시 대구 말씨를 처음 들었는데 “야 보이소”, “야 씹겁했다(놀랬다는 대구지방 사투리)” 말을 듣고 특히 “씹겁했다”란 말은 말이 쌍소리 같아 평생 안 잊어 버려진다. 지금까지 또 대구사람은 친한 친구 만나면 “야 이 문등아 잘 있었나”란 말도 이상하게 들렸다.

딸에게 보낸 1989년 11월 26일 자 편지에서

 

이런 화력의 화가에게 영예로운 ‘이인성상’이 주어졌다. 이 연장으로 한 해만에 김종학의 회고전 성격인 기념전이 열리는 것 또한 격식에 어울리는 일이다. 모두 대구에서 비롯된 인연이다.
김종학에게 대구는 또 하나의 고향 같은 곳이다. 월남 동포였던데 이어 6.25 동란 때인 어린 시절에 대구를 만난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어릴 때 얼마간 머물었던 곳의 인상은 한 평생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도 어린 시절의 대구 기억을 적을 정도다.
그래서 이번 기념전은 일종의 귀향전 같기도 하다. 그리고 대구가 낳은 걸출한 화가 이인성도 다시 한번 생생하게 기억하자는 추모행사 임도 간과할 수 없다.
이인성은 얼마간 전문미술교육을 받기 이전에 이미 입신한 자수성가형 천재화가였다. 영국 소설가 몸(Somerset Maughm)이 후기인상파인 폴 고갱의 일대기를 토대로 적은 <달과 6펜스>에서 “천재,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경탄할 만한 존재야. 하지만 그걸 가진 자한테는 무거운 짐이지,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굴지 않으면 안 돼요”라고 당부했지만 그만 불의의 죽음을 맞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비극적 사연은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으로 최근 세상의 화제가 되었던 장승업과 닮은 바 있다. 역시 자수성가형의 타고난 화가였지만, 죽음의 사연은 세상의 무심함으로 말미암아 베일에 가려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이인성이 지금 우리 화단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학을 통해 재음미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기념전이 추모전으로 여겨질 정도로 두 사람은 인연이 만만치 않음도 기억할 만 하다.
이인성 그림의 시체는 한 시인의 평가가 압축적이다 . “그는 무슨 부적같이 향토적인 것을 그림 한구석에 그려 넣기를 좋아했다…. 이인성만큼 한국적인 것을 형상화했던 화가는 드물다. 그가 자주 즐기던 그 특유의 카민 계의 붉은 빛깔은 바로 한국의 흙빛이었다. 대구 근교만 하더라도 비가 내린 직후의 붉은 흙을 피부로 가진 야산이 많았다. 그는 이러한 빛깔을 그가 설계한 아틀리에의 문에도 칠해 놓았으며 그 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마디로 대구의 향토성을 탁월하게 구현했던 화가란 말이다.
향토성은 지방성을 말함이다. 이 점에서 김종학 또한 뒤질 수 없다. 산과 바다 그리고 들꽃 등 설악산 일대의 크고 작은 풍경을 그림의 주제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형상 서울, 개성, 해주 등 일부 지방이 백토 땅이고 나머지 한반도 땅은 적토 내지 황토란 점에서 붉은 빛깔의 땅이 대구만의 고유특성이라고 볼 수 없지만, 대구 땅 또한 붉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들꽃이야 주변 오대산이나 점봉산에 피고 있지만, 김종학의 들꽃은 설악산의 들꽃이라 여겨진다는 점에서 설악에 얽힌 김종학의 지방성도 분명하다. 이인성의 화력은 수채화가로 출발했다. 김종학 또한 1985년에 서울의 원(圓)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수채에 푹 빠졌던 적이 있으니 이 또한 공통점이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의 한편으로 차이가 적잖음도 당연하다. 한마디로 이인성이 고갱적이라면 김종학은 고흐적이다. 대표작이라 할만한 <경주 산곡에서>(1935)가 보여주듯이 이인성의 붉은 빛 바탕은 고갱의 원시성을 구현하는 색깔과 많이 닮았다. 이는 고갱이 타히티 풍경을 그린 <우린 어디서 왔는가, 우린 누구인가, 우린 어디로 가는가>(1987)의 그림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은 상징적 문학성에 크게 영향받았던 일본 화풍과도 관련이 있다 한다. 그렇긴 해도 “세상에 도무지 새로운 것은 없다” 했던 영국의 미술평론가 허버트 리드의 말처럼, 이인성은 이인성이기도 하지만, 고갱과 비유될지 있는 이인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견주어 무엇보다 김종학의 빠른 붓질이 고흐를 닮은 점이다.
이인성을 통한 김종학의 평가는 구상화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다. 반(反) 회화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 미술사조에 대한 반성의 촉구이기도 하다.

 

15.

이 글은 30년에 가까운 교유를 통해 간파한 김종학의 반생기(半生記)다. 지극히 내향적인 성품인 화가에겐 대학에서 함께 미술을 공부했던 아주 가까운 동업자들 말고는 교우하는 인사는 아주 드물다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와 가까이 지내게 된 계기는 필시 그가 따르던 미술대학 스승 장욱진의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가상하게 보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덕분에 대개의 화가들은 붓을 드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법인데도 그 몰입의 경지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고, 그런 관계를 아는 화가의 딸은 유학 중에 받았던 아버지의 편지뭉치를 송두리째 보여주기까지 했다. 대부분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쓰인 편지로서 부정(父精)의 따뜻함과 간곡함이 넘쳐나는 내용에다 아름다운 수채 그림이 담겨있어 그 딸이 2백여 통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이 가능했다. 필자가 인용하는 편지 구절은 어순과 철자법을 약간 바로잡은 것이다.
화가의 남매 자녀 중 맏이인 딸(1969년생)은 미술 특기생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 대학을 졸업했다. 화가는 딸의 그림공부에 호의적인데도 딸은 창작의 고뇌로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작업을 엿보고는 “화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아직 붓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한다.
좋게 보면 이 글은 오래 그리고 깊은 교분을 통해 간파한 김종학에 대한 일종의 작가론이다. 당연히 언젠가 미술평론가가 적는 전문적인 작품론이 적혀지는 날이 올 것이다.

 

김형국 ( 서울대 교수 )
김종학의 그림 반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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