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 윤명로, 서울미대 명예교수

아직 여명이 새벽 공기를 가르기도 전인데 초인종이 힘차게 울렸다.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간 아내가 안절부절못한다. 여느 때처럼 아내는 짐짓 미소를 머금고 바짓가랑이가 이슬에 흠뻑 젖은 종학이의 양말을 갈아 신겼다. 영문도 모르고 종학이의 품에 안긴 가지 꽃과 고개 숙인 잡초들이 천년이나 묵은 토기 속에 가득 찼다. ‘어이, 가지 꽃 토기하고 잘도 어울린다.’ ‘어디서 꺾었어.’ 말이 없다. 북한산 자락을 몇 시간이나 헤맸는지 벌렁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한때 지독한 외로움으로 강물처럼 밀려오는 세계사의 시류 속에서 우리는 고흐의 눈동자처럼 극적인 생애를 살 수 없을까 하는 황홀한 상상만으로 잠 못 이루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서로를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잠이 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김종학을 처음 만난 것은 고독, 불안, 절망 같은 언어들이 휴머니즘이라고 읊조리던 시절이었다. 때 묻은 고무신짝에 막걸리를 돌리며 낙산 위에 걸린 초승달을 보고 우리는 세잔과 보들레르를 사랑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리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세라믹 벽화를 공동으로 제작한다. 나라 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사금파리와 토기 파편들로 그 높은 비계 위를 올라타고 앉아 막노동하면서 나라 안에서 처음이라던 세라믹 벽화를 제작한다. 그리고 국전에 반기를 들고 협회를 경성하고 덕수궁 담에 그림을 내걸 때도 종학이는 군에 입대한 몸인데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공교로이 초대전이나 국전뿐 아니라 삶의 궤적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금도 변함이 없다. 종학이는 나무를 참으로 잘 아는 친구다. 66년 도쿄 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나무 판에 새긴 ‘역사’라는 목판화로 상을 받더니 슬금슬금 조상들의 숨결이 베어 있는 목기를 찾아 골동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일정한 수입도 없으면서 그림 팔아 돈이 좀 생기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골동 가게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목기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남 달리 샘도 많고 욕심꾸러기였던 그가 갖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집한, 이제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목기들을 조건 없이 몽땅 국립 박물관에 기증해 버렸다. 종학이가 아니었다면 재료의 특성상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아름다운 목기들이 그의 빛나는 안목과 넉넉한 마음으로 되살아나 지금 우리들 곁에 있다. 국립박물관도 놀랐다는 그의 눈썰미는 어디서 온 것일까. 배운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그는 비교적 단순한 것, 비례가 아름다운 것, 재질이 뛰어나서 별로 손 갈 곳이 없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의 수집벽은 목기뿐만이 아니다. 궁중에서 입었던 화려한 활옷부터 몬드리안이 흉내를 냈을 법한 보자기며 한 뜸 한 뜸 수놓은 옛 여인의 한 서림 베갯잇과 골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한도 있고 정겨움도 있고 무관심도 있다. 종학이는 학생 때 별스럽게 모딜리아니와 르동의 그림을 좋아했다. 병약한 몸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음악과 시를 사랑했던 르동을 사랑했다. 르동은 한때 인상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그 방법에 동조하지 않고 판화와 소묘에 열중하더니 쉰 살이 넘어 파스텔과 유채로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며 시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완성한다. 종학이도 한때 앙포르멜운동에 참여하고 개념적인 설치작업으로 도쿄에서 개인전도 가졌다. 그리고 뉴욕에서 판화연습 하다가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더니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손을 툴툴 털고 홀연히 설악산 자갈밭에 자리를 펴고 그의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쓴다. ‘설악산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서 밤마다 별을 쳐다보고 달을 보고 설악산의 밤은 왜 그다지도 낮게 떠서 빛나고 있었던지, 하여간 열심히 밤하늘을 보며 백 장의 좋은 그림을 그리고 죽자. 백 잠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의 나비, 꽃 그림들이 나오게 됐단다. 낮에는 그 넓은 벌판을 헤매며 열심히 꽃과 나비를 봤단다. 거기서 아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박혀 괴로워했던 그림의 방향도 전환점도 찾아냈다.’ 종학이가 그리는 그림의 주제들은 단순하다. 산과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벌과 나비와 새들이 전부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기웃거리지만 아무래도 나비나 텃새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스산한 바람소리, 물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그림의 실마리가 되는 듯하다. 회화에서 꽃 그림은 양의 동서를 따져 말할 나위도 없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이어져 온 가장 자연주의적이며 감각적인 존재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뒤러의 엉겅퀴, 고흐의 해바라기, 보나르의 미모사, 조지아 오키프의 사막에 핀 꽃, 앤디 워홀의 꽃들···. 꽃그림든 말이 없다. 비록 역사성과 상징성은 다르지만 꽃은 책갈피와 창문 너머로 다가와 우리들을 바라본다. 꽃은 분명 우리들의 정서를 새롭게 창조한다. 그런데도 종학이는 뜻밖에도 꽃그림이 타락한 화가의 대명사처럼 보였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꽃과 나비는 한때 그의 안목이 투영된 과거로부터 비켜나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요즈음 친구는 점점 말이 없다. 시비와 가부를 초월한 듯하다. 꽃을 그리지만 꽃을 그리지 않고 있다. 나비를 그리지만 나비를 그리지 않고 있다. 그는 색채의 뒤엉킴이 빚어내는 색채와 형태들 때문에 꽃과 나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뒤범벅이 된 색채와 형태 속에서 전율한다. 그는 이러한 화면과의 일체를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림일 뿐이다.’

 

윤명로, 서울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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