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의 예술과 삶 / 이경성 미술 평론가

변모

화가 김종학에 관한 예비지식이 없이 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은 그 화가가 20대에서 30대 정도의 나이일 것이라고 짐작을 할 것이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전면구도, 소재의 천진스러움이 젊음의 열기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화가 김종학이 50에 접어든, 그러니깐 중견이라고 하기에도 나이가 든 화가이며 초반기의 활동 후 약 10년이 지난 다음에 이과 같은 변모와 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김종학은 1937년 신의주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해방 후에는 온 가족이 흩어지는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남하하여 재동 국민학교와 경기 중 · 고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고교 1학년 때부터 학교의 권위적이고 몰개성적인 수업방식을 혐오하여 철학, 음악에 심취하였고, 학교수업을 거부하여 퇴학 직전에 이르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고수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 1962년에 졸업하였다.

그가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60년 이른바 ‘60년 미술가 협회’의 일원이 되면서였다.

 

 

새로운 것을 위한 몸부림

이때의 화단은 50년대까지의 안이한 분위기에서 깨어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기운과 움직임이 현저하였다. 특히 50년대부터는 프랑스의 엥포르멜운동, 미국의 액션페이팅과 같은 새로운 미술사조가 직접 또는 일본을 거쳐 들어와서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화가들의 체질을 개선했다.

김종학도 그러한 세례를 받은 신생아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혼돈에서 헤매고 질서를 모색해서 검은색이나 짙은 황갈색의 소용돌이가 화면을 지배하였다.

이 당시의 젊은 화가들은 작품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작품을 남긴다는 의미보다는 내면에서 폭발하는 예술적 의욕을 발산 또는 표출하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김종학도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그의 60년대 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은 그 같은 화단의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인 것이다. 덕수궁 담에서 개최한 <60년대 미협전>이라든지 가두시위를 서슴지 않았던 화가 김종학의 등장 배경은 이 같은 재야 그룹 속에서다. 많은 화가들이 국전에서 인정을 받아 한 사람의 화가가 되는 손쉬운 길을 택한데 반해서, 김종학은 순전히 재야에서 야생화로 성장했던 것이다.

1962년에 당시의 조형 모험을 한 몸에 지녔던 <악튀엘 미협전>에 참가해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1963년에는 당시 새로운 미술관을 집합시킨 <세계 문화자유회의초대전>,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 작가초대전> 등에 참여함으로써 화업을 추진하였다. 1963년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국립박물관 최순우 선생이 주동이 된 한국 최초의 <판화 5인전>에 초대되어서 판화 제작에도 손을 대었으며, 같은 해 신문회관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함으로써 명실공한 화가로서의 출범을 기약하였다.

이렇게 화단에 등장한 청년작가 김종학은 문자 그대로 혼자의 힘으로 화단이라는 높은 장벽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실력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현대미술이 새로운 것과 낡은 것과의 충돌 내지 조화를 겪는 과정에서 김종학과 같은 야생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성숙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국내외의 첨단적인 조형의 모험에 돌진하여 많은 전시에 참여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전위 화가로 성장하였다.

 

 

70년대-침체와 재생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 그는 고식적인 화단의 중압과 미니멀 아트의 획일성에 회의를 느끼고 또한 결혼생활의 파탄에서 오는 실의를 달랠 겸 1977년 미국으로 가서 79년까지 뉴욕에 머물면서 체질 개선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작업에 전력을 쏟기에는 가정적인 문제가 너무 심각하였으므로 3년간 실의 속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였고, 또다시 설악산으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인생에서 받은 큰 상처를 감당치 못한 김종학은 자신의 예술을 지속치 못할 정도였고 생존마저도 이어가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김종학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소생시킨 것은 자연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산에서 만나는 모든 아름다운 자연의 형상, 그중에도 온갖 꽃의 아름다움은 생의 의미를 상실한 그에게는 마지막 위안인지도 몰랐다. 그의 꽃 그림은 그와 같은 상태에서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미국 시절 김종학의 회화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감추기 위해서 환멸과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감추기 위해서 인간 탐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린 인간은 조화로운 형태가 아니라 이지러지고 상처받은 인간이었다. 그 인간은 3차원적이 아니라 2차원적인 평면으로 동양화의 수묵화 같은 흑백 주조였다. 그와 같은 시기의 다음이 설악산의 꽃 그림 연작인 것이다. 꽃 그림이 화려하고 장식적이지만 설악산 시기와 미국 시기의 연관성은 격렬한 표현력에 의존한다는 데에 있다. 고독과 상처를 달래기 위해, 반대급부적으로 가장 화려한 것을 표현한 것은 일종의 반사작용이었다.

설악산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생활하던 80년대 초의 김종학은 인사동을 비롯한 골동가를 돌아다니며 골동품 수집에 골몰하였다. 무엇인가 인간 이외의 물질에 애정을 쏟음으로써 텅 빈 가슴을 채우고자 한 것이 바로 골동품 수집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체험을 통해서 그는 서양문화에 대한 동양문화의 우위성을 깨달았다. 이제까지는 서양문화가 동양문화를 압도하였으나 앞으로는 동양문화가 서양문화를 포섭하리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 무렵 김종학은 거의 인사동에서 살다시피 하여서 인사동에 나가면 반드시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만나게 되면 그가 그날 발견한 물건에 대해 자랑 섞인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실의의 나날을 지나 김종학은 마침내 행복을 되찾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생활도 안정되고 그의 화업도 추진되었다.

 

 

꽃·원색

그러면서 그의 화면은 점점 커졌고 원색의 꽃들이 그 화면을 마구 메워 갔다. 감각적인 그의 회화는 새로운 신선미를 주며 오히려 현대성을 초월하였다. 그리하여 최근 3년 동안 그는 이러한 꽃에의 매몰과 원색의 탐닉 속에 자기의 인생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원근법과 같은 원칙적인 약속을 무시하고 2차원적인 평면에 골몰해서 색채의 탐닉 속에 온갖 감각을 바치고 있는 화가 김종학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린 그림은 그의 그림이지만 이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작품에서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여 시각적인 공감을 느끼고, 즉각적으로 미의 향연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김종학은 마치 색채의 폭풍과도 같고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감각적인 색채의 난무 속에 스스로를 불사르고 있다. 이 같은 미적 흥분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불길처럼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화석화되어 영원한 형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론은 화가 김종학에게는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잃어버린 시간을 쫓아 혼신의 열을 다 바치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의 앞날은 누구도 예언할 수 없는 미지수로 가득 차 있다.

 

이경성, 「김종학의 예술과 삶」, 『선미술』, 1987년 봄, pp.16-20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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