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의 자연 – 김종학의 화면 / 오광수, 미술평론가

김종학의 화면에는 일상으로 만나는 자연이 가득 들어있다. 특별히 어떤 것을 그린다는 의식 없이 주변에 널려있는 것들을 아무런 격식 없이 화면으로. 산이 있고 숲이 있고 개울이 있는가 하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밭이 나오고 거기 몰려드는 온갖 벌레와 나비와 새가 등장한다. 화면에는 언제나 이런 것들로 가득 찬다. 어떤 것을 특별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화면에는 무차별적인 대상의 어지러운 등장을 인해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현란한 생명의 향연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설악산에 정주하면서 자기 주변을 그리기 때문에 그의 화면에는 설악의 풍경과 그 주변의 정경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각도 자연주의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그를 쉽게 자연주의 화가로 분류하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인 거리에서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원생의 체험으로서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본다기보다는 온몸으로 느낀다고 할까 자연과 부단히 일체가 되는 놀라운 범신적 관념이 화면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꾸민다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것으로서의 건강한 혼융만이 있을 뿐이다. 민화를 연상케하는 치기가 화면에도 건강한 꿈이 누빈다. 온갖 공해로 찌든 현대인에게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바로 이 건강한 미의식이다.

그의 화면에는 세 가지 특징이 걷잡힌다. 전면화와 사선 구도와 물성의 자립성이 그것이다. 전면화란 화면 가득히 대상이 자리 잡는 구도를 이름이다. 여기에선 시각의 위도나 사물들끼리의 위계가 애초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모든 대상은 평면이란 공간 속에 쏟아 부어진 형국을 취한다. 앞뒤나 위아래의 공간적 질서가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는다. 단지 그것들은 작가와의 관계에서만 존재성을 지닌다.

전면화에 못지않게 사선 구도가 두드러지게 걷잡힌다. 사선 구도의 선호는 아마도 설악산의 가파른 산세에서 획득된 것이 아닌가 보인다. 사선으로 흐르는 개울과 그 개울물을 따라 헤엄쳐가는 물고기 떼도 사선구도로 잡힌다. 가파른 산세는 물론이고 아스라이 전개되는 숲도 사선으로 자리 잡는다. 사선 구도는 단연 시각적 긴장을 유도한다. 힘찬 자연의 내밀한 기운이 사선을 타고 화면을 가로지른다.

또 하나의 특성은 진득한 안료가 주는 물성의 훈훈함이다. 안료는 대상을 구현해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안료는 안료 자체의 자립성을 강하게 들어낸다. 현란한 색소와 터치의 강렬한 구현이 대상을 앞질러 나타난다. 안료가 지닌 물성의 감동적인 자기 발언이 대상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회화적인 회화란 수식은 이렇게 해서 가능하다.

 

오광수, 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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