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풍경화로 사유하는 ‘설악’의 화가 / 오광수,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구상 회화라면 낡은 형식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시대의 미의식이 전통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상황에 전적인 요인이 있지만, 뛰어난 구상 회화가 없었음에도 그 일단의 요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새로운 경향이 대두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유행 심리가 유독 우리 미술계에 강한 점을 떠올리면, 특정한 영역을 고수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경향과 방법이 층을 이루고 그 깊이를 다질 때 미술 풍토가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계의 단점은, 천편일률적이니 일방적이니 하는 비판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다양성의 빈곤에 있다.

2003년 5월에 열렸던 김종학 전 전시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오랜만에 부담 없는 작품에 시달려 온 사람들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회화가 날로 위축되어 가는 시대에 다시 가장 회화 다운 회화를 만났다는 자족감이 이심전심으로 전달되었음이다.

김종학(金宗學)은 이십 년 넘게 설악산에서 살고 있다. 이십 년간 설악산에서 살아온 김종학의 화면에는 설악의 풍경이 이십 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설악에 사니까 설악의 풍경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설악의 화가’라는 애칭을 부여하기도 한다. 산을 주로 그린다 해서 ‘산의 화가’니, 바다를 많이 그린다고 해서 ‘바다의 화가’니 하는 애칭이 있다. 그런데 김종학을 두고 설악의 화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어느 특정한 대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과는 분명히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대상으로서 설악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설악을 통해 자기 속에서 내재화된 설악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설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설악에 사는 한 예술가의 내면 풍경이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면에는 일정한 거리로서의 원근이 없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앞에 있는 것이나 뒤에 있는 것이나 일정 간격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 평면이라는 단면 속에 나란히 놓인다. 앞에 있는 것이나 뒤에 있는 것이 간격의 질서를 넘어 서로 뒤얽혀 놓인다. 모든 설악의 대상은 똑같은 위치에서 작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중심이고 어떤 것이 배경인지 공간의 질서나 화면구성의 논리는 애초에 끼어들 틈이 없다. 설악의 모든 대상이 작가와의 관계 위에서는 같은 하이어라 키를 지닌다. 그의 화면이 균질화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인은 이에 말미암는다.

김종학의 화면은 숨이 막힌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자연의 열기 때문만이 아니다. 튜브에서 금방 짜낸 것 같은 원색의 난무가 주는 강렬함 때문만도 아니다. 사물 앞으로 바짝 다가가는 숨 가쁜 시각의 밀도가 우리의 숨을 턱에 닿게 만든다. 카메라 렌즈의 줌이 밀어붙이는 무서운 속도 때문이다. 앵글이 앞으로 나갈수록 거리는 지워진다.

거리가 지워지면서 모든 사물은 몸속으로 흡인된다. 눈은 마치 흡반(吸盤)과 같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동시에 무차별하게 뱉어낸다.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몸속으로 끌어들이고 뱉어내는 것으로서의 호흡의 결과라고 할까. 그런 숨 가쁜 호흡이 질료 하는 매체로 구현된다. 그러기에 표현이라기보다 표현 속에 사는 것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김종학의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개별이면서 전체다. 대상으로서의 개별과 전체로서의 풍경이 오버랩된다. 개별이면서 전체, 동시에 전체이면서 개별로서 다가오는 대상과 풍경은, 대상과 풍경이기 이전에 자연이요 우주다.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개별로서 구현되지만 자연 또는 우주라는 거대한 울림 속에 부단히 함몰된다. 자연 및 우주의 거대한 울림은 뜨거운 에너지로 화면에 폭발한다. 화면에 다가가면서 숨 막히는 이유는 너무나도 생경한 자연 또는 우주의 기운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층위(層位)가 다양하다. 인식의 차이에 의해 그것의 접근방법이나 분류 역시 다양한 편이다. 통상 회화에서의 자연은 풍경으로 이해되었지만, 여기에 과학적인 인식을 동반해서 자연과학으로서의 대상의 진실을 포괄할 때 자연주의로서의 이념이 형성된다. 최근에 들어와 자연은 일체의 인공적, 문명적인 것에 대한 대비적인 개념으로서 생태학적인 순수성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미술가들 역시 생태학적인 의미의 자연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단순한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 문명 비판적인 요소를 개입시키는 작품의 경향도 늘어 가는 추세다.

자연이 파괴되어 간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전 세계적인 관심사로 피력된 지 이미 오래다. 자연을 파괴하는 모든 요인을 색출하고 고발하는 장치도 절실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후(淳厚)한 감정의 회복 역시 절실하다.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살아 숨 쉬는 자연으로서 말이다. 김종학의 작품이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살아 숨 쉬는 자연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화면 속의 대상은 박제된, 또는 정지된 어느 순간이 아니라, 숨 쉬고 맥박이 뛰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우리의 순후한 감정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김종학의 화면은 통상적인 자연 풍경화도 아니고 자연과학적인 의미의 자연주의도 아니다. 그렇다고 생태학적인 문명 비판을 내면에 지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속에 잠자는 자연에 대한 순후한 감정을 일깨우는 일종의 감정이입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내가 일체가 되는 훈훈한 감동으로서의 기록이랄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 표현 속에 자적(自適)하는 그의 화면은 그런 만큼 질료의 생생함과 행위의 자재(自在)로움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유화 안료의 진득진득한 맛이, 때로는 미끌미끌하게 이어지는 터치와 때로는 텁텁하게 짓이기는 터치를 통해 선명하게 구현된다. 회화가 실종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시대에 그의 작품은 아직도 회화가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앞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것도 아직도 회화가 살아 있구나 하는 반가운 해후에서일 것이다.

‘회화적인 회화’라는 말이 다소 어색하지만, 김종학의 화면은 정말 회화적이라는 수식에 걸맞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는 것이 무엇인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인가, 자신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구현하는 것인가, 시대의 의식을 표명하는 장(場)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는다. 물론 이것들도 있다. 그러나 먼저, 그린다는 것은 그린다는 행위를 통한 사유의 형식이다. 그림으로써 사유하는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김종학의 그림을 통한 사유는 자연과 더불어 일체화되어 가는 감정이입으로서의 사유다. 그의 작품이 때로 치기만만한 것도 기교로써 사유를 방해하지 않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런 그의 그림을 두고 민화(民畫)와 견주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도 나는 동감한다. 그가 한동안 민화와 민구(民具)를 포함한 전통적인 유물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연히 민화의 회화적 특징에 대한 감명과 이해가 자신의 작품에 녹아들었음직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 어디에도 민화를 흉내 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옛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옛것을 그대로 옮겨 오거나 부분적으로 그 특징을 흉내 내는 일들을, 마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례들이 많다. 옛것은, 그 속에 담긴 정신이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날 때 비로소 계승되는 것이지 모방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종학의 화면이 보여주는 비(非) 기교적인 방법은 민화의 아마추어리즘과 닮아 있지만 민화를 흉내 내거나 민화의 구도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회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순후한 사유의 방식을 현대에 되살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나뭇가지와 나뭇등걸로 뒤얽힌 숲속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별처럼 영롱하게 빛을 발한다. 거기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잉잉댄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와 가지 끝으로 기어오르는 벌레가, 그리고 땅바닥에 웅크린 개구리가 하나가 되어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연출한다. 계곡에 쏟아지는 물소리와 물속을 유유히 헤엄쳐 가는 송사리 떼와 맨드라미 붉게 타오르는 정원에 붉은 벼슬을 한 암수 닭의 한가로운 나들이 모습은 오래전에 잊진 원초의 풍경들이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관람자 역시 감정이입에 휘말려들어 아련한 원생(原生)의 풍경들을 기억해낸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나팔꽃이나 할미꽃에 절로 ‘아!’ 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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